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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문언 안수집사를 추모하며

작성일
2016-11-25
작성자
운영자
조회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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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문언 안수집사를 추모하며
 
 
오동수 장로<토평교회>   
 
 
오동수장로.jpg
김문언집사는 생전에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 사촌 형 되는 서귀포 강정교회의 김문현장로의 인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늘 자랑하였다.

1960년 서귀포 토평리에 예배당을 짓는다는 소식을 서귀포교회 강성빈목사로부터 듣고, 그는 강정리에 있는 전 재산을 정리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아무런 연고 없는 토평리로 이사 와서는, 재정적인 지원이나 교인도 별로 없는 토평교회 18평 예배당을 지어 냈다.

예수님만 잘 믿으면 아브라함의 축복이 자손들에게까지 흘러내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김 집사가 토평으로 이주해 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강성빈목사와 서귀포교회 정동규장로 두 분이 의논하여 예배당을 지을 200여평 부지를 매입하게 하였지만, 건축할 여력이 없었던 토평교회를 위해 김 집사 가정이 토평리로 건너 오게 된 것이다.
 
김 집사는 평소에 목수 일을 했다. 그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면서 1960년부터 2년에 걸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돌을 다듬고, 돌을 지고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예배당을 지었던 것이다. 필자는 1961년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와서 감격스럽게 완공된 그 돌집 예배당에서 교역자도 없이 강정출권사와 맨 바닥에 보리 짚을 깔고 호롱불을 밝히며 어린이 몇 명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어느날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그만 호롱불이 바닥에 떨어져 불이 붙어 식겁했다. 부랴 부랴 불을 끄고 예배를 드린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김 집사는 예배당을 짓고는 어떤 보수도 받지 않고 어렵게 살다가 1년 후에 서귀포로 이사를 하였다. 그 이후에도 토평교회가 두 번째(1972년), 세 번째 예배당(2001년)을 지을 때마다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면 김 집사는 자신의 어려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상당한 건축헌금을 해주셨다.

지난 2016년 10월 16일 주일에 큰 아들 김석청 안수집사(제주성안교회)가 본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나서 필자를 만나고는 “위경 중에 있는 부친이 저에게 토평교회에 가서 내가 과거에 지었던 토평교회가 부흥하고 있는지? 오동수 장로는 어떻게 잘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해서 오늘은 특별히 왔다”고 방문 이유를 말했다.

김석청집사는 또한 자기 부친의 기록물이나 사진이 있다면 건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필자는 그 말을 듣고 토평교회 60년사를 내주면서 김 집사 병문안을 가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0월 18일 저녁 6시경에 토평교회 장석준목사 내외분과 함께 김 집사 병실을 찾아갔다. 큰딸 김갑순 권사(서귀포제일교회)와 여러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집사는 병환으로 눈도 뜨지 못한채 누워있었다. 부친의 귀에다 대고 “아버지 토평교회 오동수 장로가 왔수다” 고 여러번 알리자 감겼던 눈을 번적뜨면서 필자를 쳐다보았다.

순간 김 집사의 눈에서 보배로운 빛이 비춰졌다. 큰아들은 오른 손목, 필자는 왼 손목을 잡고서 장석준목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는데, 다음날 새벽 4시경에 김문언 집사는 향년 97세로 소천하였다.

지난 10월 21일 제주성안교회 류정길목사와 교우들이 고인의 장례예식을 교회장으로 치렀다. 미망인 강경희권사와의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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